창세기 1장은 성경 전체의 시작이자, 인간 존재와 우주의 기원을 다루는 위대한 선언으로 기록되어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은 단순한 종교적 고백을 넘어서, 존재의 근원과 질서의 시작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과학이 발전한 현대 사회에서는 “창조”라는 말과 “과학”이라는 단어가 종종 대립되는 개념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진화론과 우주 팽창 이론, 지구의 연대와 같은 주제들은 창세기의 설명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신앙과 과학은 반드시 충돌해야만 하는가? 혹시 그것은 우리가 창세기를 해석하는 방식, 그리고 과학이 말하는 내용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실제로 많은 현대 신학자들과 기독 과학자들은 창세기 1장을 신앙과 과학의 갈등이 아닌, 대화의 출발점으로 이해하려 한다. 창세기 1장은 과학 교과서가 아니며, 하나님이 인간에게 세상의 질서와 의미를 언어로 보여준 신앙적 선언이라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다.
이 글에서는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가 과학적 사실과 어떻게 연결되고, 때로는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읽혀야 하는지를 4가지 관점에서 살펴본다. 이 대화의 핵심은 신앙은 왜 생겼는지에 대해 말하고, 과학은 어떻게 생겼는지를 설명한다는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다. 창조와 과학은 서로를 부정하는 개념이 아니라, 각자의 언어로 같은 진실에 접근하는 방식일 수 있다.
창세기 성경 1장은 ‘과학적 설명’이 아닌 ‘신앙적 세계관 선언’이다
가장 먼저 명확히 할 점은, 창세기 1장은 현대적 의미의 과학 기술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고대 히브리 문화에서 기록된 이 본문은 천체의 구조나 생물학적 분류, 시간 단위의 정밀한 해석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대신 이 장은 모든 존재의 시작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근본적 진리를 선포하고 있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 1:3)는 표현은 물리학적 현상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혼돈 위에 질서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명령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6일에 걸쳐 창조를 진행하신다. 이는 문자 그대로 24시간 × 6일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를 문학적 구조로 해석한다. 창세기 1장은 대칭적인 구조로 되어 있으며, 13일은 형태를 만들고(분리), 46일은 그 안에 채움을 넣는 형식이다. 예를 들어, 첫째 날 빛과 어둠을 나누고, 넷째 날 해와 달, 별을 만드신다. 이 구조는 의도적 질서와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한 신앙적 메시지임을 시사한다.
과학이 세상의 ‘기능’에 초점을 맞춘다면, 창세기 1장은 세상의 ‘의미’를 말한다. 즉, 왜 세상이 존재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목적 안에서 생긴 것이다. 이런 이해는 창세기 1장을 과학과 경쟁하게 만들지 않고, 서로 다른 차원에서 대화하게 만든다. 과학은 설명의 언어이고, 창세기는 의미의 언어다.
성경에서 창조 질서 속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유동적이다
창세기 1장을 읽을 때 가장 논쟁이 되는 부분 중 하나는 바로 ‘6일 창조’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우주는 6일 동안 완성되었고, 지구는 약 6,000~10,000년 전쯤에 창조된 셈이다. 하지만 현대 과학은 지구가 약 45억 년, 우주는 약 137억 년 되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 차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첫째, 성경에 등장하는 ‘날’(히브리어 욤)이라는 단어는 반드시 24시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편 90편 4절에는 “주의 눈에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다”고 적혀 있다. 베드로후서 3장 8절 역시 동일한 구절을 인용하며 하나님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하나님께서 정하신 ‘날’은 기계적인 단위가 아니라 구별된 시기의 흐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창세기 1장에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라는 반복 구절이 등장하지만, 그 기준은 해와 달이 창조되기 전(4일째)부터 적용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질서와 리듬의 개념을 가르치기 위한 장치이지, 절대적인 시간 단위의 선언이 아님을 시사한다. 이처럼 창조의 시간은 단순한 ‘시계 시간’이 아니라, 의미의 시간(카이로스)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과학이 말하는 시간은 측정과 계산의 시간(크로노스)이다. 그러나 성경의 시간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움직이는 의미 있는 시간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창세기의 시간 개념은 과학적 시간과 충돌하지 않으며, 오히려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존재의 목적과 방향성을 제공한다.
생명 창조에 대한 과학과 창세기 성경의 관점 차이
진화론은 생명의 다양성과 기원을 설명하는 과학 이론이다. 단세포 생명체가 점차 복잡해지고, 유전적 변이와 자연 선택에 따라 오늘날의 생물이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종류대로 생물을 만드시고, 사람을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선언한다(창 1:26). 이것은 과학과 완전히 대립되는 주장일까?
사실 많은 기독 과학자들은 유신론적 진화론을 통해 두 관점을 통합하려 시도한다. 이는 하나님이 진화라는 자연적 과정을 통해 생명을 설계하셨다는 입장이다. 중요한 핵심은 ‘어떻게’ 생명이 만들어졌느냐가 아니라, ‘누가’ 생명을 주도하셨는가이다. 창세기는 그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생명은 우연이나 무작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아래 존재하게 된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말은 단순히 생물학적 구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창조자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 도덕적 판단과 영적 감수성을 지닌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뜻한다. 과학은 인간의 유전구조나 진화 과정을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의 가치와 목적, 존엄성의 기원은 과학이 설명하기 어렵다.
창세기는 바로 이 지점을 분명히 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닮은 존재로 창조되었으며, 그 안에는 생물학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가 과학이 담지 못하는 영적 해석의 지점을 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성경 속 창조의 목적은 ‘존재’가 아니라 ‘관계’에 있다
창세기 1장의 가장 놀라운 점 중 하나는, 우주와 생명이 단지 ‘존재하게 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설명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존재의 이유를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찾는다. 하나님은 세상을 무심하게 만든 창조자가 아니라, 매 순간 피조물을 돌보며 대화하시는 인격적 존재로 묘사된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는 표현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단지 기능적으로 만족스러워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과 기쁨으로 창조된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감정적 반응이었다. 이처럼 창조는 효율이나 성과가 아닌, 관계와 아름다움 속에서 완성된 것이다.
과학은 물질의 본질을 탐구하고, 우주의 작동 원리를 설명한다. 반면 창세기 1장은 우주와 생명의 목적이 무엇인가, 왜 존재하는가를 묻는다. 두 관점은 서로 다른 질문을 던지고 있으며, 둘 다 필요한 진리를 제공한다. 하지만 인간은 단지 분석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하고 예배하고 관계 맺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따라서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단지 과학과의 비교가 아니라, 삶의 방향성과 존재의 이유를 묻는 본질적인 선언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말한다. “너는 우연한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며, 그분과 동행하기 위해 창조된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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