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창세기 1~2장의 히브리어 핵심 단어 분석
성경은 번역된 책이다. 그렇기에 성경을 깊이 있게 이해하려면, 원어로 기록된 단어가 어떤 뜻을 품고 있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창세기 1~2장은 하나님과 인간, 자연과 생명의 관계를 정의하는 ‘창조 이야기’의 근원으로, 단어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가 매우 함축적이고 상징적이다.
히브리어는 언어 구조상 단순히 명사나 동사를 넘어서, 단어에 내포된 어근과 사용 맥락이 그 단어의 기능과 신학적 의미를 좌우한다. 이 글에서는 창세기 1~2장에서 핵심적으로 등장하는 히브리어 원어 4~5개를 중심으로, 각각이 담고 있는 창조 신학적 의미, 생태적·인간론적 통찰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성경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은 독자, 생태신학적 관점에서 창조를 해석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본 글은 신학적 기초가 되는 글이 될 것이다.
성경 속 בָּרָא (바라):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창조
창세기 1장 1절은 성경 전체의 문을 여는 구절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여기서 ‘창조하다’는 동사로 쓰인 히브리어는 “בָּרָא(바라)”이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주어로 사용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창조 동사이다. 사람이나 다른 피조물은 이 단어로 무언가를 만들 수 없다.
“바라”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개념을 담고 있으며, 기존 재료나 질서로부터 조합해 만드는 개념이 아니라, 전혀 없던 존재를 있게 하는 절대적 창조 행위를 의미한다. 이는 히브리적 창조관이 신의 전능성과 주권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바라"는 창세기 1장 1절, 21절(바다 생물과 새), 27절(인간 창조)에서만 쓰이는데, 이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 중 특별히 의미 있는 사건에만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즉, 창세기의 창조는 단지 우주의 시작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창조 세계 사이의 존재론적 거리, 질서의 시작, 피조물의 의존성까지 선언하는 것이다. "바라"는 단어 하나로 창조의 절대성과 피조물의 유한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성경 속 טוֹב (토브): 하나님의 질서에 대한 평가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이 매일 창조하신 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반복해서 선언하신다. 이때 쓰이는 히브리어 단어는 “טוֹב(토브)”, 곧 “좋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단어는 단순히 외적 아름다움이나 쾌적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토브”는 히브리어 세계관에서 “목적에 부합하며, 조화롭고, 생명에 이롭게 작용하는 상태”를 뜻한다.
즉,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좋다”고 하신 평가는 자신의 창조 의도와 구조, 기능이 완벽히 맞아떨어지는 상태를 칭찬한 것이다. 이는 현대의 주관적 미적 판단과는 다르며, 하나님의 질서와 관계성 속에서 생명 시스템이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상태를 말한다.
특히 “매우 좋았더라”(토브 메오드)는 인간이 창조된 이후에 선언된다. 이는 인간의 존재가 생태계 파괴의 시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서 ‘조화롭게 살 책임을 지닌 존재’로 처음 주어진 평가였음을 의미한다.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 아니라, 그 안에 잘 녹아드는 존재일 때 ‘좋다’는 평가를 받는 존재인 셈이다.
성경 속 צֶלֶם (첼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창세기 1장 26~27절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구절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이다. 여기서 ‘형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צֶלֶם(첼렘)”이다.
“첼렘”은 본래 고대 근동 문화에서 왕이 자신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해 세우는 ‘상징물’이나 ‘조각상’을 뜻하는 단어였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신의 ‘첼렘’으로 창조하셨다는 말은, 인간을 지구라는 창조 세계 위에 놓인 하나님의 ‘대표자’로 삼으셨다는 선언이다.
이 개념은 인간이 신성을 가지거나 특별히 우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창조 질서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 수행할 청지기적 사명을 부여받은 존재라는 의미가 더 크다. “첼렘”은 존재의 고귀함이 아니라 기능의 역할에 대한 선언이다.
즉, 인간은 창조 세계를 파괴하거나 마음대로 지배하라고 세워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답게 창조 세계에 생명, 질서, 공의, 돌봄을 실현하는 사명을 지닌 대리인이다. 생태신학은 바로 이 “첼렘” 개념을 오늘날 환경 위기 시대의 인간 책임 윤리를 설명하는 핵심어로 사용한다.
성경 속 עָבַד וְשָׁמַר (아바드 & 샤마르): 경작하고 지키는 생태적 소명
창세기 2장 15절은 인간이 에덴동산에 처음 배치되는 장면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니라.” 여기서 ‘경작하다’와 ‘지키다’는 각각 “עָבַד(아바드)”와 “שָׁמַר(샤마르)”이다.
“아바드”는 단순한 농사 기술이 아니라, 히브리어 전체 문맥에서는 ‘섬기다’(serve), 예배하다라는 의미도 함께 갖는다. 즉, 인간은 땅을 착취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하듯 땅을 섬기고 봉사하는 존재로 창조된 것이다.
“샤마르”는 보존하고 보호하다는 의미로, 창조 세계를 훼손하지 않고 돌보는 태도를 가리킨다.
이 두 단어는 창조 이야기가 생태윤리의 근거가 되는 이유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인간은 에덴이라는 공간을 개발하거나 정복하기 위해 배치된 존재가 아니라, 보호하고 가꾸는 존재로 위임받았다. 에덴은 단지 시작의 공간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연결된 관계의 모델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아바드와 샤마르’를 잃어버린 시대를 살고 있다. 땅을 섬기기보다 소비하고, 지키기보다 착취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히브리어가 말하는 인간의 소명은 지금도 유효하다. 창조 세계를 돌보는 것이 곧 예배이고 순종이라는 진리는, 지금도 우리에게 묵직한 책임을 부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