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자유의 개념과 현대 민주주의
인간은 태초부터 무엇인가를 '쌓아 올리고자' 하는 존재였다. 그것은 단순히 물리적 구조물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를 높이려는 내면의 욕망과 연결된다. 성경 창세기 11장에 등장하는 바벨탑 사건은 인류 최초의 문명화된 도시가 등장하는 시점에서, 인간 욕망이 어떻게 방향을 잃고 신의 자리를 넘보게 되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사건은 단순히 언어가 혼잡해진 일회적 역사 사건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스스로 절대적 존재가 되고자 하는 본능적 열망, 그리고 그 열망이 가져오는 질서의 붕괴와 공동체 파괴를 담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바벨탑을 흙벽돌이 아닌 데이터, 기술, 권력, 명성으로 다시 쌓고 있다. 이 글은 바벨탑 사건에 담긴 인간의 본능적 욕망을 분석하고, 그 욕망이 현대 사회와 개인 삶에 어떤 함의를 주는지에 대해 신학적이면서도 심리학적으로 해석해본다.
성경 속 바벨탑 사건 ‘우리 이름을 내자’: 자기 확장의 욕망
바벨탑 사건의 핵심 문장은 “자, 우리가 성과 탑을 쌓아 하늘에 닿게 하고, 우리 이름을 내자”이다. 이 문장에는 인간의 자기 확장, 자기 증명, 자기 영속성에 대한 욕망이 집약되어 있다. 당시 사람들은 한 언어를 사용하며 강력한 결속력을 가졌고, 그것을 기반으로 인류의 중심 도시를 세우고자 했다. 그들의 목적은 단순한 주거 공간 확보가 아니었다.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하고, 역사에 흔적을 남기며, 신적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였다.
이는 단순한 ‘탑 쌓기’가 아니라, 신의 영역에 대한 침범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계단형 사원) 문화를 떠올리면, 바벨탑이란 상징은 단지 높은 건물이 아니라 신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야망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는 다르지 않다. 타인의 인정을 갈망하며 SNS에서 ‘좋아요’를 받고, 이름이 검색되길 바라며 커리어를 관리한다. 학력, 연봉, 명성, 구독자 수 등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기억되는 인간’이 되고자 한다. 이 모든 활동의 밑바닥에는 바벨탑과 같은 질문이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얼마나 높이 오를 수 있는가?”, “나는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기억될 수 있는가?” 바벨의 욕망은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불안과 연결된다. 영원하지 않은 존재가 영원해지고자 하는 갈망, 그것이 바벨의 첫 번째 본질이다.
성경 속 바벨탑 사건 ‘흩어짐을 면하자’: 통제와 안정에 대한 욕망
사람들이 탑을 쌓은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이다. 이 말은 단순히 지리적 이동을 피하자는 차원을 넘는다. 창세기 9장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땅에 충만하라, 온 땅에 퍼져 번성하라”는 명령을 주셨다. 즉, 인류의 확산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거부했다. 자신들이 익숙한 문화, 언어, 구조 안에 머물기를 원했다. 이 욕망은 불확실성과 다양성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비롯되며, 통제 가능한 체계 안에서 살아가려는 인간의 본능을 보여준다.
이 장면은 현대 사회의 모습과 유사하다. 사람들은 변화와 다양성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통제 가능한 질서 속에서 안정을 추구한다. 기업은 폐쇄적 문화 속에서 내부 권력을 강화하고, 정부는 규제를 통해 시민을 통제하며, 개인은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피하기 위해 스펙과 보험과 자산을 쌓는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삶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구조물' 안에 가두려 한다. 바벨탑은 그 구조물의 상징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탑을 무너뜨린다. 인간이 만든 안정은 창조주의 질서와 충돌할 때 필연적으로 붕괴된다. 진정한 안정은 통제가 아닌 신뢰와 순종 안에서의 자유로부터 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벨처럼 자기만의 성을 쌓다가 공동체는 분열되고, 언어는 끊기며, 결국 고립과 혼란만 남게 된다.
성경 속 하나님이 개입하신 이유: 욕망은 반드시 방향을 묻는다
하나님은 바벨탑을 보고 직접 말씀하신다. “그들이 한 마음이 되어 이 일을 시작했으니, 이대로 가면 못할 일이 없겠구나.” 여기서 하나님은 인간의 기술력이나 창조력을 문제 삼지 않으셨다. 문제는 그 능력이 어디로 향하고 있느냐는 방향성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창조성과 잠재력을 주신 분이지만, 그 능력이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자기 우상화를 위해 사용될 때 반드시 개입하신다.
바벨탑 사건은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장면이 아니다. 오히려, 욕망이 자기파괴로 흐르는 것을 막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제재이다. 만약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인류는 자신이 만든 시스템 안에서 타인을 지배하고, 하나님 없는 세상을 설계하며, 결국 더 큰 영적 파국을 맞이했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성경은 매우 정밀한 인간 이해를 보여준다. 욕망은 문제의 근원이 아니다. 욕망이 자기중심으로 흐를 때, 그것이 죄의 문이 된다. 성경은 욕망을 억누르지 말고, 올바른 방향으로 전환할 것을 요청한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자 하는 욕망을 품었고, 바울은 세계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바벨은 방향 잃은 욕망의 실패 사례였고, 성경의 인물들은 욕망을 하나님께 향할 때 어떻게 역사가 바뀌는지를 보여준다.
욕망은 창조 동력이다. 그러나 그 동력이 하나님과 단절된 채 작동하면, 언제나 파괴적인 결과를 낳는다.
성경 속 바벨 이후를 살아가는 오늘의 인간에게
바벨탑 사건은 단지 과거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는 물리적 탑 대신 디지털 바벨, 경제적 바벨, 심리적 바벨을 쌓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내 이름을 내기 위해", "흩어짐을 피하기 위해" 무언가를 구축하며 살아간다. 학력과 직위, 자산과 팔로워 수, 브랜드와 권력은 모두 새로운 형태의 탑이다.
문제는 그 탑의 중심에 하나님이 아닌 ‘나’가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지금 무엇을 쌓고 있는가? 그 탑의 꼭대기에는 누구의 이름이 새겨질 것인가?”
바벨 이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높이려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내가 너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라”고 약속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반전을 본다. 하나님을 높이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들어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반면, 스스로 이름을 세우는 자는 그 이름조차 흩어지고 만다.
오늘의 우리는 어느 쪽에 속해 있는가? 인간의 욕망은 중립적이지만, 방향이 잘못되면 바벨이 되고, 방향이 바뀌면 아브라함이 된다. 우리의 탑이 무너지기 전에, 그 욕망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려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의미에서의 건축이 시작된다. 하나님이 기초를 놓으신 탑은 절대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